칼 세이건이 보이져 호에 카메라를 장착하는것을 추천해서 우리는 태양계 끝에서 보는 지구를 기계의 눈을 통해 보았다.정말 이미지상 1도트 밖에 안되어 보이는 창백한 푸른점.우리가 아는 아름다운 푸른빛과 하얀 구름빛이 섞인 그 위대하고 경이로운 지구가 아니라, 집중하지 않으면 놓치는 작은 점. 사람은 삶과 죽음에 항상 의문을 표하고, 그 두가지의 비밀을 알기 위해 노력했다.선사시대의 샤머니즘부터 현대과학의 냉동인간까지. 이제 왜 노화와 죽음에 순환에 큰 축인지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이해하고,하나하나 그 껍질을 벗기고 있다. 하지만, 물리적 생물학적 축에서 삶과 죽음은 종과 생명체 또는 절대적 기준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우주의 작은 점에서 일어나는 극히 짧은 시간의 현상일 뿐이겠지만. 인류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머리속에 상상이라는 무한대의 공간에 둘 수 있는 존재이다. 사람만다 그 내적우주의 크기가 다르고, 노화할수록 보통 그 크기는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난다. 생각해보면 어린이 또는 우리가 하는 행동과 상상은 그 제약이 없고 무한대에 가까운 확장을 하지만. 성인이 되고 각종 교육을 받을 수록 그 범위는 좁아지고 작은 공간에 많은 것을 집어 넣다가. 멈추게 된다. 이것이 죽음 아닐까? 필자는 죽음의 의미는 잊혀지는거고 삶의 의미를 잃은 거라고 생각한다. 시대의 기준에 따라 장수의 기준이 달라 나이대를 이야기 하기 어렵지만 현대 한국에서 보통 90이 넘어가면 자기의 삶이 다했다고 생각하는 노인들이 ‘빨리 죽어야 하는데’라는 말을 되뇌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분들도 자손들이 찾아오면 욺직이기 힘든 몸을 이끌고 그들을 맞이한다. 이건 아직 삶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죽음은 삶의 의미가 없는 삶 자체가 행복하지 않다면 살아 있음에도 죽어 있는것이다. 무엇을 해도 희노애락이 없고. 의미 부여가 안된다면 무슨 삶이란 자체가 마음속에서 죽어버린것이고 이는 신체가 움직이고 순환하는 것 외엔 ’죽음’에 가까운거라는 거다. 죽음이 사람에게 적용되는건 본인이 스스로 희노애락을 전혀 찾지 못하거나, 타인 전부에게 잊혀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살아 있음에도 죽음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는게 있을까? 모든 희노애락을 잊음은 신체적 본능 즉 먹고 자는 것마저 잊어야 하는 것이 궁극적인 것이라서 있을 수 없고,완전히 타인에게 잊혀진 것은 그 사람의 삶의 형태를 기억에서 완전히 없애는 것이라 불가능하다.산속에 혼자 10년 외부 출입없이 살아도 누군가는 그를 기억한다. 신체적 삶에 끝나고 흙으로 돌아가면 누구도 그 사람의 자취는 과거형에서 끝나고, 기억속에서 죽음과 같이 공존하기 때문에 진정한 죽음이 되는것이다. 우주학자들이 표현할 수 없는 광대한 크기의 우주속에 인간의 존재를 바라 볼때. 뇌속 아니 인간속의 광대한 우주를 언급하기도 한다. 아무도 삶과 죽음 존재는 그 본질을 정의할수 없다. 하지만, 삶의 진정한 의미는 언제나 존재한다. 우리가 보통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으면 각각의 반려동물의 다름을 이해하기 어렵다. 같은 종류 같은 색의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보면 두 개체의 다름은 인지되지 않고 본인의 직간접 경험에 의한 정보속에 그 특징을 정의 할 것이다. ’귀엽다’,‘물거 같다’,‘발톱을 세울거 같다‘ 등의 그런 보편적 정보말이다. 사람이 타인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동물에 비하면 개체의 특성(얼굴, 성별, 키, 출신지 등)에 따라 다양한 경험을 통해 다양한 사전 정의와 사후 정의가 나뉠뿐 그 개개의 본질을 구분짓는건 불가능한 수준일 것이다. 그러면 과연 삶의 본질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우주적 관념에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까? 아니다. 개개의 사람 동물 식물 모두가 현재 시점에서 우주이자 개체인것이다.그 어떤 의미도 없는데 바이러스 같은 것들은 왜 존재할까?? 우주적 위대함이 아닌 분자 원자 수준의 생명체들은 왜 존재 하는 것일까? 그 존재 자체가 의미를 가지는 역설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질병, 사고 등 무수한 것들이 삶을 방해하고 생명을 위협한다. 스스로 삶을 포기 하는 경우도 매 초마다 일어나는 일이며, 스스로를 비하하는 사람도 정신병이 있어서 사회에 해를 끼치는 사람도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를 이루고 그 사회에서 상대적 가치를 찾고, 상대적 행복을 느끼는 것은 태생적 운명이기 때문에 본질적 행복 쾌락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도덕 윤리적 개념은 시대에 따라 다르고 속해 있는 사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절대적 가치 일수 없지만 통상 어기게 되면 비난 받고 배척 받기 때문에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 아니면 그 기준이 다른 무리를 찾아야 한다. 나는 그 선이 개개인이 다를수 있고, 나에게 무언가를 손해를 끼치지 안는 선만 지킨다면 그 어떤 것이든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무리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무리의 기준이 내가 소득을 창출하는 곳을 제외한다면 말이다.내 소득은 불특정 다수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선은 지켜야 나머지 내 인생의 가치관을 지킬수 있기에. 만약 그 그무릴 수만 수십만명으로 늘릴수 있다면 그건 윤리적 도덕적 가치관도 바꿀수 있을것이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다양한 행복 믿고 따라오면 배신하지 않는 무리, 내가 조금 모자라더라도 행복할수 있게 해주고 월등하다 하더라도 시기받지 안고 그 월등함을 누릴수 있는 사회, 내가 만들어 가는 세상이다. 삶과 죽음은 그 본질의 차이가 없겠지만, 오늘의 존재와 의미를 찾는 내일의 희망이 오늘의 즐거움이 되는 무리 사회를 만들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