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의 기준을 어딘가에서는 고급주택에 고급차량을소유한것을 기준으로 하고, 어딘가에서는 일년에 얼마를 버느냐로 판단하기도 하고 여러가지 방향으로 판단한다. 중고등학교때 서민, 중산층, 상류층으로 구분하는 용어를 들어봤고 그 상류층이 부자라는 자각을 하게 된다.그런데 그 상류층에 포함되는 정확한 기준을 가르쳐주진 않았고 지금도 누구도 정의하지 못한다. 한달에 300만원을 버는 집에서는 1천만원을 버는 사람이 상류층으로 보일 수도 있을것이고, 1천만원을 버는 사람은 2천만원은 벌어야 상류층에 가깝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절대적 기준에서 그런 개념이 존재 할수 없는것은 이것이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얼마를 벌고 얼마를 쓰는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포함된 사회, 지역, 국가에서 내가 어느정도 수준에 있는지가 그 척도가 될 것이다. 즉 포함된 그룹중 내 수준이 평균대비 얼마나 높은지다. 여기서 딜레마가 생긴다. 이게 글로벌화된 세상 즉 하루면 세상 어디든 갈수 있고, 실시간으로 지구 반대편의 소식을 듣고 대화할수 있는 세상에서 전 세계적 개념인지 국가내의 개념인지 사는 도시내 개념인지 명확치 않다. 뉴욕에서 년간 20만불을 버는 사람은 중산층에 겨우 턱걸이를 하지만 방글라데시로 비교하면 상류층이 되는것이다. 그런데, 글로벌 시대에 함정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동에 자유를 누리며 굉장이 굉장히 넓은 지역을 여행을 하던 일을 하던 움직이고 다닌다. 그러나, 만나고 대화하고 상대를 어느정도 알 수 있는 사람은 매우 한정적이다.내가 사는 집 주변 몇 십미터, 직장내, 거래처 정도가 거의 전부일것이다. 즉 비교대상이 되는 그룹은 매우 소규모 그룹일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만약 내가 서울의 최고급 아파트중 하나인 한남동 나인원에 산다고 가정하면, 고급차나 보유 주택은 내가 거주하고 있는 그룹의 모든 사람이 가진 자산일 뿐인것이다. 즉 그곳의 사람들은 이태원의 좁은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과 비교할 상황이 매우 제한적이다. 현대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구밀도가 엄청난 도시에 살고, 공동주택에 거주하기 때문에 부의 비교가 매우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 수천만원을 벌어도 최저임금을 받아도 같은 지하철을 타고 있을수 있고,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을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1인 미디어의 발달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신이 속하지 않은 그룹과의 단편적인 비교가 넘. 만연해 실상황 보다는 단순한 불평등이 더 체감되는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 즉 실제 생활에는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데 가상의 미디어 생활속에서 너무나 부러운 삶을 매순간 즐기는 사람이 넘쳐난다. 자신의 삶을 너무나 비교하게 되는 삶은 불행하기 쉽다.‘저 사람은 투자가 대박나서 슈퍼카를 타는데 난 ?‘, ‘저 사람은 저렇게 좋은 집에서 멋진 삶을 사는데’ 등 등 수많은 비교를 하면서 한 없이 자신을 낮추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자신이 뭘 가졌는지. 얼마나 좋은 삶인지를 절대적 기준에서 볼 필요가 있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 진정으로 난 행복해 지기 위해서 어떤 삶을 살곳 있나? 모든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 매 시간 본인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행복에 촛점을 맞추고 생각하기부터 시작하자.상대적 가치를 최대한 무시하자. 어떤것을 먹는 것보다 지금 먹을수 있는 음식 중 가장 행복한 음식을 먹고, 그 음식을 즐기고 지금 살고 있는 거주공간을 가방 아늑하게 꾸미자. 주변사람중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을 늘이고, 비교하지 않고 서로 즐기는 삶을 살 수 있게 하자.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지나간 일은 잊어버리되 후회스러운 일 조차 현재와 미래의 자양분으로 그 역할을 한다고 인식하자. 너무 많은 것을 이루려 하지 말아야 하지만, 자신의 능력과 스스로의 존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자. 자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우주조차도 의미가 없다. 내가 있으므로 내가 인식하는 우주도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우주도 나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굳이 남의 단편적인 행복이 나의 삶의 기준점이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